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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근대역사 문화공간여 행 2022. 8. 14. 08:30
목포 근대역사 문화공간 (木浦 近代歷史 文化空間)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은 1897년 목포가 국제 무역항으로 개항하면서 외국인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설치한 각국 거류지 지역이다. 조선 시대 군사 시설인 목포진(木浦鎭)이 있던 곳을 중심으로 주변 해안가를 간척하여 근대 시가지를 형성하였다. 지금도 당시의 바둑판식 도로 구조와 근대 건축물이 원형대로 잘 남아 있는 공간이다. 개항 당시 목포 각국 거류지의 총면적은 726,024㎡(약 22만 평)인데, 이 중 핵심에 해당하는 지역을 등록문화재 718호로 등록하였다.
이 공간은 과거 일본인들이 다니던 소학교 일대에서 목포역 방향으로 이어진 대표 도로를 중심에 놓고, 유달산 · 목포진 · 선창을 연결하는 구조이다.
이 일대에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한 구 일본 영사관을 비롯하여, 경제 수탈의 상징인 구 동양 척식 회사 건물, 일본인들이 다녔던 학교와 교회, 일본식 민가, 백화점을 비롯한 상업 시설 등이 밀집해 있다.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은 식민지 수탈의 아픔을 기억하는 공간이자 부두 노동 운동 · 소작 쟁의 의병 · 항일 운동 등 민족의 저항 역사가 함께 숨 쉬는 곳이다. 또한 해방 이후 항구 도시 목포 사람들의 삶의 중심 터전이기도 하다.*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
호남은행은 민족 자본 육성을 위해 현준호를 중심으로 한 한국인 지역 유지들이 힘을 모아 1920년에 설립한 은행이다. 일제의 식민지 금융 정책에 맞서 독자적으로 운영을 하다가 1942년에 동일은행과 강제로 통합되었고 이후 조흥은행으로 명맥이 이어졌다.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은 목포 상권의 중심인 오거리에 세운 호남은행 목포지점 건물이다. 현재의 건물은 1929년 11월 11일에 신축한 것이다. 2층으로 된 사각형 모양의 벽돌 건물로 표면에 붉은색 타일을 붙여 멋스러움을 더한 것이 특징이다.
1897년 개항 이후 상업 도시로 성장한 목포에는 근대 금융 건축물이 많이 생겼는데, 현재는 이 건물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한국인이 설립하고 운영한 민족 은행이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은 근대 문화유산이다.등록문화재 제 29호이다.
* 구 목포 화신 연쇄점
구 목포 화신 연쇄점은 일제 강점기 목포에서 가장 번화한 '긴자(銀座) 사거리에 있었던 건물이다.
붉은 벽돌을 이용했으며, 전면부를 교차로와 어울리게 곡선 형태로 만들었다. 내부는 상품 진열이 쉽고 넓은 개방형 공간으로 만들고, 곳곳에 기둥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이 건물은 일본 가고시마현 출신으로 1898년 일본 영사관 소속 경찰로 목포에 들어온 후 상인으로 변모한 마루오카 다수쿠치로(丸岡佐次郎)가 일제 강점기인 1932년에 지어서 총포 화약 · 서양식 가구 등을 수입해서 파는 상점을 운영했다. 그러다가 한국인 서병재가 소유권을 인수하여 1935년부터 1938년까지 목포 화신 연쇄점으로 사용하였다. 서병재의 동생이자 목포의 대표적인 독립 운동가 서병인(1896~1948) 독립 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연쇄점을 운영에 관여했다고 전해진다. 1층은 서양품 공예품·화장품 판매점, 2층은 문방구·가구·악기 판매점, 옥상에 위치한 3층은 식당과 양복 판매점이었다. 목포 화신 연쇄점은 독립적인 규모를 갖춘 한국인 백화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 발간한 『호남평론』에 “여러분의 백화점" 이라는 표현이 담긴 광고가 남아 있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이 건물은 이후에 1938년부터는 조선 신탁주식회사,1941년 부터는 조선 운송 주식회사, 1972년부터는 대한 통운 목포 지점으로 사용하였다. 현존하는 목포의 근대 상점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외관도 화려하다.국가등록문화재 제 718-15호이다.
* 목포 해안로 붉은 벽돌 창고
목포 해안로 붉은 벽돌 창고는 붉은 벽돌을 이용해 만든 창고 건물이다.
이 건물은 책을 펼쳐서 엎어 놓은 모양인 박공 지붕 형태의 창고 3개가 나란히 있는 구조이다. 창고마다 출입구가 따로 있고, 내부에 서로 연결하는 작은 문이 있다. 1964년에 처음 등록된 것으로 되어있으나 1954년 목포 항공사진에 나타나고 있어서 더 오래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1897년에 목포가 무역항이 되고, 1914년에 호남선을 개통하면서 부둣가 주변에 많은 창고 건물을 지었다. 이는 목포항을 거쳐서 일본으로 수탈해 갈 쌀과 면화 소금 등 물자를 보관할 창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 목포에는 조선 운송 주식회사와 조선 미곡 창고 회사 등 창고를 가지고 영업을 하는 전문 회사가 번성했는데 목포 해안로 붉은 벽돌 창고도 이러한 배경 속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목포 해안로 붉은 벽돌 창고는 붉은 벽돌을 이용한 창고 가운데에서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식민지 수탈 창고를 보여 준다는 의미가 크다.국가등록문화재 제 718-14호이다.
* 목포 번화로 일본식 상가 주택 3
목포 번화로 일본식 상가 주택 3은 일제 강점기 목포 상업의 중심지였던 행정(幸町, 현 행복동) 모퉁이에 조성된 건물이다. 긴 한 지붕 아래 여러 상가가 분할되어 있는 형태이다. 1층은 상가이고, 2층은 주택으로 사용이 가능한 일본식 주상복합 건물이다. 건축물 대장에는 이 건물이 산야합명회사(山野合名會社) 의 소유에서 나누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목포 해운 조합 주식회사 대표, 목포 신보 주필 등을 지낸 일본인 '야마노 다키조(山野瀧三)'와 관련이 있는 회사이다.
이 건물의 1층 모퉁이 부분은 1980년 5·18민주화 운동 당시에 목포 지역 지도자였던 안철 장로가 운영했던 동아 약국 자리이다.
이곳은 근대 건축물이자 민주화 운동 사적지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건물 2층에는 건립 당시 구조와 왜돗자리(다다미방)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국가등록문화재 제 718-13호이다.
* 목포 번화로 일본식 상가 주택 2
목포 번화로 일본식 상가 주택 2는 일제 강점기 목포 상업의 중심 지역에 세운 주상복합 건물이다. 이 건물은 당시 복산정, 현 복만동과 행정(幸町, 현 행복동)이 교차하는 사거리의 도로변에 있었는데, 복산정에 속했다. 이 건물의 최초 소유자는 전남 비료 합명 회사, 목포 소주 판매 회사, 모리타 상점(守田商店) 등을 운영한 일본 상인 '모리타 센스케(守田千助)' 인데, 과자점 등으로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건물은 도로에 접한 정면 부분이 좁고, 안쪽이 더 길게 지어진 2층 목조 건물이다. 건물의 왼편에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석조 방화벽이 있다. 지금도 나무 계단과 2층 주택부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안쪽에 작은 마당과 우물이 있다.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 주상 복합 건물 기능을 형성한 상업 거리의 흔적, 역사성, 장소성을 보여 주는 상가 건물이다.국가등록문화재 제 718-12호이다.
* 구 동아 부인 상회 목포지점
구 동아 부인 상회 목포지점은 일제 강점기 상업 시설이 밀집한 지역에 세워진 상점이다.
이 건물은 전면보다 내부가 약 3배 정도 길쭉한 형태의 구조이다. 원래는 1층은 상가, 2층은 주거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게 지어진 주상 복합 건물이다.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나무 계단이 보존되어 있고, 안쪽에 작은 마당이 있다. 왼쪽 건물과 두꺼운 석조 방화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금도 건물 외관과 내부 목재 구조의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애초에 이 건물은 잡화 판매와 화재 보험 대리점을 겸한 하타노 상점(波多野商店)' 이었다.
최초 소유자인 일본 상인 '하타노 류스케(波多野龍介)' 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31년 이후부터는 동아 부인 상회 목포 지점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동아 부인 상회는 생활 용품을 판매하기 위해 1920년에 설립하였는데,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한 최초의 근대적 사업이었다. 1937년 신문에 '목포의 대백화점 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로 크게 발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운영자는 '정남룡(鄭南龍)' 이었다.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 주상 복합 건물 형태의 상업 거리의 흔적을 보여 주는 점,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한 최초의 장소라는 점 등에 가치가 있다.국가등록문화재 제 718-11호이다.
* 목포 부두 근대 상가 주택
목포 부두 근대 상가 주택은 목포 사람들이 영해 잔교라고 부르는 옛 부두와 근접해 있는 상가 건물이다. 1949년에 신축한 것이다.
이 건물은 사거리 교차점에 세워진 위치적 특징이 건축의 형태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도로 면에 맞춰 전면을 사선 형태로 만들었고, 좌우를 대칭으로 하여 안정감을 주며 1층의 3면 모두에 입구를 두어 물건을 진열하고 옮기기 편하게 하였다. 내부 건축 자재로 붉은 벽돌을 이용하였고, 2층에는 수직형 목조창을 만들었다. 목포 선창가에 남아 있는 상가 건물 가운데에서 원형이 잘 보존된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이 건물 일대는 각종 어선들의 출입이 빈번한 곳이어서 인근에는 어선에 필요한 용품을 판매하는 상가들이 많이 들어서 있는데, 1949년에 세운 이 건물은 해방 이후 목포 선창가의 사회상을 보여 주는 유적이다.국가등록문화재 제 718-10호이다.
* 소년 김대중 공부방
* 목포진지
* 목포 번화로 일본식 상가 주택 1
목포 번화로 일본식 상가 주택 1은 일제 강점기에 가장 번화했던 중심 지역(본정, 현 대의동)의 사거리 모퉁이에 있는 건물이다.
구 일본 영사관 건물과 동양 척식 주식회사 건물로 연결되는 지점에있다. 건축 연도는 1935년으로 등록되어 있다.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이곳에 당시 일본의 신흥 종교인 천리교(天理敎)의 목포 선교소가 있었다.
이 건물은 상가와 주택이 결합한 일본식 점포 주택인 '마치야(町家)' 형식이다. 1층은 상업 공간이고 2층은 주택으로 사용이 가능한 구조이다. 교차로에 자리한 입지 조건에 맞춰 건물 모서리 벽면 부분이 사선으로 처리되어 있다. 구전에 의하면 이 가게에서는 일본 나막신을 판매했다고 한다. 최근까지 슈퍼마켓으로 사용하였다.국가등록문화재 제 718-7호이다.
* 구 동양 척식 주식회사 목포지점 ☞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일본이 한국 경제를 침탈하기 위해 1908년에 설립한 특수 회사이다. 일본인의 이주 지원, 식민지 지주 육성, 농장 관리, 금융 등이 주요 업무였다. 서울에 본점을 두고 전국 주요 도시 9곳에 지점을 세웠다.
구 동양 척식 주식회사 목포지점은 본래 나주에 있던 출장소를 1920년에 목포로 옮긴 것이며 건물은 1921년에 신축한 것이다. 해방 이후 이 건물은 대한민국의 해군 기지로 사용하였다. 1946년부터 1974년까지 '해군 목포 경비부'로, 1974년부터 1989년까지는 '해군 제3 해역 사령부 헌병대로 사용하였다. 이후 헌병대가 영암군으로 이전해 감에 따라 1999년까지 약 10년간 빈 건물로 방치하여 철거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식민지 수탈의 역사를 증명하는 근대 문화유산으로 보존해 달라는 시민 사회와 학계의 요구에 따라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하였다. 이후 내부 보수를 거쳐 2006년도부터 근대 역사관(현재 별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목포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일제 강점기 건축물로 식민지 수탈의 상징 공간이라는 의미가 있다. 또한 해군의 역사가 담긴 국방 유적의 가치를 함께 지니고 있다. 건물의 외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당시 사용된 대형 금고가 그대로 남아 있다.전라남도 기념물 제 174호이다.
* 구 목포 부립 병원 관사
구 목포 부립 병원 관사는 구 동양 척식 주식회사 목포 지점과 대각으로 마주 보는 위치에 서 있는 일본식 고급 주택이다. 건축 연도는 1935년으로 등록되어 있으나 구전으로는 1920년대에 지어진 것이라고한다. 이 집의 최초 소유자는 목포 해운 회사, 조선 제유 회사, 태평 양조, 목포 소주 판매 회사 등에 참여했고, 전남 비료 회사의 대표를 지낸 일본 상인 '모리타 센스케(守田千助)' 이다.
이 집은 이 주택의 맞은편에 있던 목포 부립 병원의 관사로 사용하였다는 설이 있다.
해방 후에는 동양 척식 주식회사 건물이 해군기지가 되면서 해군 관사로 사용하다가 개인 소유가 되었다. 1966년부터는 나상수의 주택이 되었다.
일본 기와로 된 복잡한 지붕 구조가 특징이며, 내부 마당에 일본식 정원이 꾸며져 있다. 2006년에 내부 수리를 한 후에 일본식 주택 구조를 활용한 이색적인 상업 시설로 용도를 바꾸었다.국가등록문화재 제 718-5호이다.
* 목포 번화로 일본식 가옥 3
목포 번화로 일본식 가옥 3은 일본인이 다니던 소학교(현 유달 초등학교)에서 구 동양 척식 주식회사 방향으로 나 있는 도로변에 서 있는 일본식 주택이다. 건축 연도는 1935년이며, 최초 소유자는 석유를 주로 판매하며 목포에서 상업 회의소 임원으로 활동한 일본 상인 히라오카 도라지로(平岡次郎)이다.
이 주택은 전면부 우측에 출입문을 두고 지붕 왼쪽 부분에 돌출형 2층 공간을 마련하여 안정감 있는 형태를 보여 주고 있다. 1층 왼쪽 창문 위로는 햇빛이 직접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가림막을 별도로 설치해 놓았다.
건물의 형태가 독특하여 1994년에 상영한 한국 영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의 촬영지로 활용한 바 있다. 원래는 이와 유사한 주택이 왼쪽으로 여러 채가 나란히 있었는데 현재는 이 집만 남아 있다.국가등록문화재 제 718-3호이다.
* 목포 번화로 일본식 가옥 2
목포 번화로 일본식 가옥 2는 대마도 출신 상인으로 1897년 개항 이후 목포 일본인 상업 회의소 회장을 지내며 활동한 일본 상인 후쿠다 유조(福田有造)의 집안에서 1920년에 설립하여 운영한 후쿠다 농업 주식회사(福田農業株式會社) 소유의 주택이다. 건축 대장의 등록 연도는 1935년이다. 이 건물은 후쿠다 농업 주식회사 농장 관리인의 사택으로 사용한 여러 건물 중 하나로 추정한다.
도로변에 세워진 이 건물 내부에는 작은 마당이 있으며, 지상 1층 구조로 출입구 현관 상부 장식이 일본 민가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 주고 있다.국가등록문화재 제 718-2호이다.
* 목포 번화로 일본식 가옥 1
목포 번화로 일본식 가옥 1은 1897년 목포 개항 이후 일본인의 자녀가 다니던 소학교 입구 쪽에 자리한 일본식 주택이다. 건축 대장의 등록 연도는 1935년이다. 대마도 출신 상인으로 1897년 개항 이후 목포 일본인 상업 회의소 회장을 지내며 활동한 일본 상인 후쿠다 유조(福田有造)의 집안에서 1920년에 설립하여 운영했던 후쿠다 농업 주식회사(福田農業株式會社)의 소유였다.
이 건물은 후쿠다 농업 주식회사 직원들의 사택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도로변에 세워져 안쪽에 마당이 있는 구조이며, 1층인 저층부는 크고 2층은 작은 전형적인 일본식 민가 형태이다. 2층에는 왜돗자리(다다미)방과 일본주택 고유의 붙박이형 가구 구조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국가등록문화재 제 718-1호이다.
* 구 목포공립 심상소학교 강당
이 건물은 일본인 자녀 교육을 위해 목포에 처음으로 설립한 심상소학교의 강당이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에 앞쪽과 양쪽면은 두 가지 색깔의 타일로, 마감하였으며, 2층에는 폭이 좁은 아치창을 두었다.
목포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제 강점기의 초등학교 건물로 당시 강당 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목포 영산로 일본식 가옥
목포 영산로 일본식 가옥은 개항 후 일본인 자녀가 다녔던 소학교(현 유달 초등학교) 앞에 자리하고 있는 일본식 주택이다. 일본인 미곡상 우치다니 만페이(內谷萬平)의 저택(현 이훈동 정원)과 이어지는 도로변의 모서리에 있다. 1937년에 신축하였으며, 원 소유자 이름은 '미야자키 히사가즈로(宮崎壽員)'이다.
집 위에 또 집이 올려 진 상층 돌출형의 2층 구조로 주변의 유사한 일본식 주택 중 규모가 가장 크다. 1층과 2층의 지붕 형태가 각기 다른 형태로 꾸며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2층에는 넓은 창문을 두어 주변을 조망하기 좋게 만들었다.국가등록문화재 제 718-4호이다.
* 구 목포 일본 기독 교회
구 목포 일본 기독 교회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다니던 교회 건물이다.
1922년에 건립했고 1927년 6월에 증축했다. 원래는 2층 형태의 석조 건물이었는데, 현재는 2층 부위가 절개되어 단층만 남아 있다.
건물 출입구가 있는 중앙부를 약간 앞으로 튀어나오게 만들고 출입구의 좌우 벽면에 창문을 두었다. 정면 출입구 상부에 석조 현판이 있는데, 지금도 “木浦日本基督敎會 (목포 일본 기독 교회)"라는 글자를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건물은 전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 교회 건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한국인 윤치호와 결혼 후 평생을 목포 공생원에서 고아들을 보살핀 일본인 윤학자 (다우치 지즈코(田內千鶴子), 1912~1968)여사가 다닌 교회이다.국가등록문화재 제 718-6호이다.
* 국도 1, 2호선 기점 기념비
* 구 목포 일본영사관 ☞
구 목포 일본영사관 건물은 목포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일본이 지은 영사관 건물이다. 1900년에 건립하였다. 유달산 노적봉 아래 자락, 평지보다 조금 높아 목포항을 내려다보기 좋은 장소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은 2층 구조로 높이가 13m이고 돌출한 출입구를 기준으로 좌우가 대칭인 장방형 형태이다. 외벽에 붉은 벽돌을 주로 사용하고, 곳곳에 적절하게 흰색 벽돌을 첨가하여 건물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수직형 창틀 위에는 일본 국기를 연상하게 하는 원형 장식이 있다. 건물 2층 중앙 창틀에는 일본을 상징하는 국화 문양이 있었는데 지금은 마모되어 없어졌다. 1층과 2층 사이에는 벽돌로 허리 돌림띠를 두어 층간의 구별을 명확하게 했다. 건물 내부에 벽난로가 8개 있는 것이 특징인데, 특히 2층 중앙의 벽난로는 건립 당시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한일 관계의 변화에 따라 1905년 이후에는 이사청, 1910년부터는 목포 부청으로 사용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목포 시청, 1974년부터 목포 시립 도서관, 1990년부터 목포 문화원으로 사용하다가, 내부 보수를 거쳐 2014년부터 목포 근대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구 목포 일본영사관 건물은 목포에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크다. 건립 당시의 외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한국의 근현대사를 함께 한 역사적 의미를 인정하여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89호로 지정하였다.* 구 목포부청 방공호
* 구 목포부청 서고
* 목포 해안로 교차로 상가 주택
근대기 목포의 대표적 번화가이자 중심지였던 구 목포경찰서 앞 교차로에 면해 건축된 가장 상징적 상가 건물로 교차로에 면한 부정형의 다각형 대지에서 대지 형태에 맞춰 부정형의 다각형 평면과 독특한 외관을 구성 하였으며, 특히 교차로 모서리에 면한 수직적 벽체를 아치형 창문과 옥탑 장식을 강조한 일본 마치야(町家) 형식으로 2층 규모의 목조상가주택이다.
주거 기능을 형성한 상업거리의 흔적, 역사성, 장소성을 보여주는 보존상태가 양호한 상가건물이다.등록문화재 제 718-9호이다.
* 목포 해안로 일본식 상가 주택
목포 해안로 일본식 상가 주택은 일제 강점기 목포 경찰서 앞에서 갑자옥 모자점 방향으로 연결되는 도로의 입구에 자리한 건물이다.
건축 연도가 1935년으로 등록된 이 건물의 최초 소유자는 전남 인쇄 주식회사 임원, 무안군 농회 평의원 등으로 활동했던 일본 상인 '하기도 류타로(萩野柳太郎)’ 이다.
이 건물은 2층집으로, 한 지붕 아래 상가가 여럿으로 나뉘어 있다. 1층은 상가이고 2층은 주택으로 활용하는 일본식 점포 주택인 마치야(町家) 형식이다. 2층 전면부에 건립 당시의 원형이 남아 있고, 내부에는 여러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가 남아 있다. 비좁은 공간에 여러 건물이 밀집하다 보니 이런 식의 상가 건물을 짓는 것이 유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일제 강점기 목포항 상업 지구의 대표적인 건축 형태를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국가등록문화재 제 718-8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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