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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 3호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국 보 2017. 8. 10. 08:30
국보 제 3호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6가 168-6, 국립중앙박물관
지정일 : 1962년 12월 20일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순수척경비(巡狩拓境碑)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碑)를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으며,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윗부분이 일부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비몸의 크기는 높이 1.54m, 너비 69㎝이며, 비에 쓰여져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으로는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 신라 진흥황 척경비(국보 33호)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비에 새겨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170726)
크 기 : 碑身高(비신고) 1.54m, 同幅(동폭) 0.71m, 同厚(동후) 0.16m
재 료 : 화강석
연 혁 : 서울 북한산 標高(표고) 556m인 碑峰(비봉)의 절벽 上(상)에 동남향하여 세운 碑(비)로서 신라 제24대 眞興王(진흥왕 서기 540 ~ 575)이 이지역을 巡狩(순수)하고 기념으로 세운것으로 아직까지 발견된 四基(4기)의 진흥왕순수비중의 하나이다. 碑(비)의 형태는 다른 三碑(3비)와는 달리 長方形(장방형)으로 加工(가공)된 石材(석재)를 사용하여 자연암반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워졌는데 상부에 일단의 촉을 만든것을 보면 원래 蓋石(개석)을 덮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碑文(비문)은 碑身(비신)에 磨硏(마연)을 加(가)한 후 正面(정면)에 12行(행)이 있으나 상부는 심히 마멸되었고 제 12行(행)은 전연 판독할 수 없으며 그 이외의 부분도 자획이 명료하지 않은곳이 많다. 따라서 1행의 자수도 명확하지 않으나 30자가 넘을것으로 보이며 자체(字體)는 六朝式(육조식)의 楷書(해서)이고 字徑(자경)은 3cm이다. 文意(문의)는 다른 三碑(3비)의 碑文(비문)을 아울러 감안하면 전반은 순수의 事蹟(사적)이고 후반은 隨駕(수가 - 임금을 모시고 따라다님)한 人名(인명)을 열기하고있다. 碑側(비측)에는 李朝 純祖(이조 순조) 16年 丙子(16년 병자 서기 1816년)와 그 익년에 阮堂 金正喜(원당 김정희)가 實査來讀(실사래독)한 사실을 각자한 것이있다. 이 비가 세상에 알려진후 손상을 많이 입었으며 本碑(본비) 건립 年代(연대)는 碑文(비문)에 명기되어 있었으리라고 추정되는 年号干支(년호간지)의 磨損(마손)으로 자세하지 않으나 진흥왕 16년 北漢山(북한산)에 순행한 사실이 있으나 이를 곧 建碑(건비) 年代(연대)로 보기 어렵고 殘字(잔자)의 내용을 검토하면 진흥왕 29年(서기 568년) 이후의 진흥왕 在世時(재세시)의 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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