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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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명산 화암사조계종/그외 말사 2018. 8. 12. 08:30
불명산 화암사(佛明山 花巖寺) 주 소 : 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 1078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로 신라 효소왕 3년(694년) 일교국사가 창건하였으며, 세종 7년(1425년) 해총(海聰)이 중창하였다. 우화루(雨花樓) - 보물 제 662호이다. 극락전(極樂殿) - 국보 제 316호이다. ☞ 동종(銅鐘) - 전북유형문화재 제 40호이다. 적묵당(寂默堂) 불명당(佛明堂) 철영제(啜英齋) 명부전(冥府殿) (180417) 옛날 임금님의 딸 연화공주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사경을 해매고 있었는데 세상 다 좋다는 약도 공주의 병에는 모두 허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불심이 깊은 임금님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이미 너의 갸륵한 불심에 감동했노라"고 말하며, 왕의 앞에 조그마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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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 316호 완주 화암사 극락전국 보 2018. 7. 21. 10:30
국보 제 316호 완주 화암사 극락전 (完州 花巖寺 極樂殿) 소재지 : 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 1078 지정일 : 2011년 11월 28일 화암사는 불명산 시루봉 남쪽에 있는 절로 본사인 금산사에 딸린 절이다. 절을 지을 당시의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원효와 의상이 유학하고 돌아와 수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 문무왕 이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극락전은 1981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조선 선조 38년(1605)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며 소박하고 작은 규모를 보이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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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남이 성지 - 2믿 음/성지순례(167곳) 2018. 6. 5. 08:30
초남이 성지 - 2 * 교리당 (180417) * 초남이 성지 - 3 ➽ - 3 초남이는 ‘호남의 사도' 라고 불리는 유항검의 생가 터가 자리한 곳이다. 1754년 초남리에서 태어난 유항검은 1784년 늦은 가을 세례를 받고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함께 전라도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 거의 절대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유항검은 전라도 지방에서는 가장 먼저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고 그해 10월에 참수되는데 이 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이로 인해 유항검의 처 신희, 제수 이육희, 동정 부부이자 유항검의 아들, 며느리인 유중철과 이순이, 둘째 아들 유문석 그리고 조카 유중성이 순교하였고, 이분들의 무덤은 전주 ‘치명자산'에 합장되여 모셔져 있다. 유항검의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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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 성지 - 2믿 음/성지순례(167곳) 2018. 5. 29. 08:30
천호 성지 - 2 ➽ - 1 (180417) 천호산(天壺山)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천호(天呼) 성지는 그 이름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들이 교우촌을 이루고 ‘하느님을 부르며’ 살아온 신앙의 터전이다. 천호 성지 지역에는 박해 시대에 다리실 교우촌(천호 공소)을 포함한 총 7개의 공소가 있었는데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각 지역은 산세가 험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 말할 정도로 첩첩산중이었다. 이런 곳으로 숨어 들어와 땅을 일구고 신앙생활을 하던 교우들의 피와 땀이 지금의 한국 천주교를 일구었을 것이다. 천호는 호남이 자랑하는 천주교의 대표적 사적지로 1866년 12월에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여섯 성인 중 네 분인 이명서 베드로, 손선지 베드로,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한재권 요셉 성인과, 같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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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재 성당 - 2믿 음/그외 성지,성당 등 2018. 5. 22. 08:30
되재 성당 - 2 - 개정 증보판('19.6.30)에서 삭제 ➽ - 1 (180417) 1886년 한불 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고산 지역에 성당이 세워지는데 이곳이 바로 1895년에 완공된 되재 성당이다. 고산 본당의 전신인 되재성당은 1893년에 비에모 신부가 차돌배기(현 백석, 완주군 운주면 구제리)에 거처를 정하고 전교를 시작할 때로부터 시작된다. 비에모 신부가 이곳에 본당을 정한 이유는 박해의 여파가 남아 신자들이 주로 산간지대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 고산 지역에는 1801년 신유박해 이후부터 박해를 피해 각처에서 몰려든 신자들이 많았으며 병인박해 때에는 이 일대에 교우촌이 무려 56곳이나 됐다고 전해진다. 실재로 되재 성당이 설립된 뒤 성당 주변에는 큰 교우촌이 형성 되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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