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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동마을
    세계유산/한국의 역사마을 2021. 12. 8. 08:30

    양동(良洞)마을

    주   소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125
    홈   피 : http://yangdong.invil.org/index.html

    월성 손씨(月城 孫氏)와 여강 이씨(驪江 李氏)의 양대문벌로 이어 내려온 씨족마을로 1984년 국가민속문화재 189호로 지정 당시에는 '월성 양동마을(月城 良洞마을)'이었으나, "경주(慶州)"는 고려시대 이후부터 꾸준히 이어져 온 명칭임에 반해 "월성(月城)"은 한 때의 행정편의에 따라 한시적으로 쓰였던 행정구역 명칭으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경주 양동마을(慶州 良洞마을)'로 2009년 2월 변경하였다.


    2010년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손종로 정충비각(孫宗老 旌忠碑閣)

     

     

    관가정(觀稼亭)
    이 집은 조선 중종 때 관리로서 청백리였던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 1463~1529)의 살림집으로 중종 9년(1514)에 지은 집이다. 관가정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본다'는 뜻으로 누마루에 올라 보면 그 이름에 걸맞게 곡식이 익는 들판과 강의 모습이 넓게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대청이 매우 넓은 것이 특징인데 살림집이 후대로 오면서 제사 때 필요한 공간 확보를 위해 변형된 것이다.
    본채의 뒤쪽에 사당이 있으며, 특이하게 대문이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대문과 담은 원래 없었으나 1981년에 새로 만든 것이다. 조선 중기 남부지방의 주택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보물 제442호이다.

     

     

     

     

     

    향단(香壇)
    이 집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인 중종 38년(1543)에 병환 중인 모친을 돌볼 수 있도록 임금님이 지어준 집이라고 전한다. 이언적이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동생 이언괄(李彦适, 1494~1553)이 형님
    대신 노모를 모시고 살던 집으로 이언괄의 손자인 향단 이의주(香壇 李宜澍, 1567~1637)의 호를 따라 집의 이름을지었다.
    상류주택의 일반적 격식에서 과감히 벗어난 형식으로 편의성을 위해 행랑채, 안채, 사랑채가 모두 한 몸체로 이루어지고 2개의 마당을 가진 특이한 구조다. 집주인의 개성을 반영한 독특함과 화려함이 돋보이는 집이다. 보물 제412호이다.

     

     

     

     

     

    무첨당(無忝堂)
    무첨당은 회재 이언적 종가에 16세기 중엽에 지어진 제청(祭廳)으로, 그의 맏손자인 무첨당 이의윤(無忝堂 李宜潤, 1564~1597)의 호를 따라 집의 이름을 지었다. 뒤쪽 높은 곳에 사당이 있고, 동쪽에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이루어진 본채가 있다. 무첨당은 제사를 지내는 제청의 기능이 강했으며, 독서와 휴식, 손님 접대와 문중회의를 했던 큰 사랑채다. 대청 오른쪽 벽에 걸린 ‘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현판은 '영남에서 선비가 살고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집권 전 이곳을 방문한 흥선대원군이 죽필(竹筆)로 직접 쓴 것이다. 보물 제411호이다.

     

     

     

     

     

     

     

    경산서당(景山書堂)
    경산서당은 양동마을에 있는 세 곳의 서당 중 하나로 무첨당 이의윤(無忝堂 李宜潤, 1564~1597)을 기리고 본받기 위하여 유림(儒林)에서 건립하였다. 이의윤은 회재 이언적의 장손으로 본관은 여주이다. 서당의 이름인 경산은 「시경(詩經)」에서 유래하였는데 오랜 세월 동안 기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헌종 1년(1835) 강동면 오금리에 창건되었다가 철종 8년(1857)에 강동면 안계리로 옮겨졌으며, 안계댐 공사로 인하여 1970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강당의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동재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안 계리에 세워졌던 건물의 목재와 기와 등을 가져와 지었으며, 정원의 나무도 그대로 옮겨 심었다.

     

     

     

     

     

     

    송첨 종택(松簷 宗宅)
    경주손씨 큰 종가로 이 마을 손씨 입향조인 양민공 손소(襄敏公 孫昭, 1433~1484)가 조선 세조 5년1459에 지은 집이다.
    사랑채에 걸린 현판인 '서백당'의 의미는 '참을 인자를 백 번 쓰며 인내를 기른다'는 뜻이다.
    사랑채의 뒤쪽 높은 곳에 사당이 있으며, 마당의 향나무는 500여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지관(地官)이 '이 집터에서 세 명의 현인이 탄생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실제로 손소의 아들 손중돈과 외손자인 이언적이 여기에서 태어났다. 종가다운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사랑채 뒤편 정원의 경치 역시 뛰어난데, 건물을 지은 수법과 배치 방법들이 독특하여 조선 전기의 옛 살림집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국가민속문화재 제23호이다.

     

     

     

     

     

     

     

     

     

     

     

     

    (21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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