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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聖) 김대건 안드레아믿 음/그외 성지,성당 등 2020. 11. 29. 23:38
성 김대건 (聖 金大建 안드레아, 1821 - 1846)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에서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과 고(高) 우르술라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솔뫼는 성인의 집안이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아온 곳으로, 성인의 증조부인 김진후(金震厚: 비오)가 50세에 영세한 이후 교우마을이 됐다.
성인은 정해박해(丁亥迫害: 1827년)를 피해 할아버지 김택현(金澤錢)과 아버지 김제준을 따라 서울 청파로 이주해 살다가 다시 경기도 용인의 한덕동(寒德洞)을 거쳐 1830년 김택현이 사망한 후 김제준이 가족을 데리고 한덕동 이웃의 골배마실에 터를 잡았다.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 되고 조선천주교의 사목권을 받은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모방(Maubant)신부가 1836년 부활절을 전후해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공소를 순방하던 중, 골배마실에 인접한 은이공소를 방문하게 되며 이곳에서 소년 김대건을 신학생 후보로 선발하고 세례를 준다.
그해 12월 2일 충남 청양 출신 최양업과 충남 홍성 출신 최방제(1837년 11월 위열병으로 병사)와 함께 마카오를 향해 서울을 출발하여 만주와 요동을 거쳐 1837년 6월 7일 마카오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대표부에 도착하였다.
마카오에 도착한 이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에 의해 교육을 받았다.
1842년 중국 배를 타고 상해를 떠난 성인은 10월 요동 땅에 도착하여 백가점(白家店)에 머물면서 3차에 걸쳐 의주 변문을 통한 입국로를 개척하고자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1843년 4월부터 거처를 페레올(Fereol) 신부가 머무는 소팔가자(小八家子)로 옮겨 최양업과 같이 1844년 12월까지 신학과정을 마친 후 부제품을 받았다.
1845년 1월 1일 성인은 변문을 무사히 통과하여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여 신학생 후보를 뽑아 교육하고, 선교사 입국을 위한 지도 작성과 순교자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며 상해로 갈 준비로 동분서주하였다.
준비를 끝낸 성인은 4월 30일 사공 4명을 포함해 모두 11명의 신자와 같이 작은 배로 상해를 향해 제물포를 떠났다. 풍파와 해적을 만나는 등 고생 끝에 6월 4일 상해에 도착하였으며 8월 17일 페레올 주교의 집전으로 상해 김가항(金家巷)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로써 한국인 최초의 사제가 되었고, 일주일 후 성인은 횡당(橫塘) 소신학교 성당에서 다블뤼(Daveluy) 신부의 보좌를 받으며 첫 미사를 올렸다.
1845년 8월 31일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등 일행 13명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귀국하던 중 서해바다에서 풍랑으로 표류하다가 9월 28일 제주 용수리 해안에 표착하였다. 이곳에서 고국에서의 첫 미사를 봉헌하고 배를 수리한 후 이곳을 떠나 10월 12일 황산포 나바위 화산 언저리에 도착하였다.
조선땅을 밟은 성인은 1845년 연말까지 서울 일대에서 2개월간 활동하다가 1846년 초부터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동생 김난식(프란치스코)이 살고 있는 은이에서 부활대축일까지 약 4개월 동안 짧은 사목활동을 하였으며 은이는 체포되기 직전 공식적으로 최후의 미사를 봉헌했던 곳이다.
1846년 성인은 해로를 통한 선교자 입국로 개척과, 주교와의 연락을 위해 5월 14일 7 명의 사공과 마포를 출발하여 백령도에서 청국어선과 접촉, 편지와 지도를 전하고 6월 5일 순위도(巡威島)로 돌아올 때 관헌에게 체포되어 옹진(甕津) 옥에서 고문을 당하고,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6월 21일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된 김대건은 3개월 동안 40차례의 문초를 받고 9월 15일 염사지죄반국지율(染邪之罪反國之律)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 받아 바로 다음날인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軍門梟首形)으로 순교하는데 그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골배마실에서 성인의 복사를 서며 사제직을 꿈꾸던 이민식(빈첸시오)은 성인의 치명 소식을 듣고 새남터로 달려가 군졸의 감시 소홀을 틈타 14일간이나 모래속에 가매장된 시신을 수습하여 고생 끝에 10월 26일 미리내에 모실 수가 있었다. 이후 1901년 5월 용산신학교에 이장되고, 1950년 9월 경남 밀양 성당을 거쳐 1960년 7월 혜화동 대신학교 성당에 안치하며 하악골은 미리내 경당으로 치아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으로 분리 안치하였다.
1857년 9월 23일 비오 9세 교황에 의하여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고,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XI세에 의해 시복(諡福) 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II세에 의해 여의도 광장에서 성인품(聖人品)에 올랐다.
2019년 11월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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