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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복궁
    여 행 2018. 10. 21. 08:30

    경복궁(景福宮) 

     

    주  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1

    홈  피 : www.royalpalace.go.kr

     

    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입니다.

    북으로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쳐져, 왕도인 한양(서울) 도시 계획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하였고, 1592년 임진 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고종 때인 1867년 중건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중건된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 이었습니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의 정무 시설, 왕족들의 생활 공간, 휴식을 위한 후원 공간이 조성되었습니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만든 건청궁 등 궁궐안에 다시 여러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모인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을 철거하여 근정전 등 극히 일부 중심 건물만 남았고,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버렸습니다. 다행히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 사업이 추진되어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하였으며, 왕과 왕비의 침전, 동궁, 건청궁, 태원전 일원의 모습을 되찾고 있습니다. 

     

    광화문 - 흥례문 - 근정문 -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 - 교태전을 잇는 중심 부분은 궁궐의 핵심 공간이며,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대칭적으로 건축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되어 변화와 통일의 아름다움을 함께 갖추었습니다. 수도 서울의 중심이고 조선의 으뜸 궁궐인 경복궁에서 격조 높고 품위 있는 왕실 문화의 진수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출처 : 문화재청)

     

    광화문(光化門)

    경복궁의 정문이다. 광화문은 조선의 법궁에 해당하는 궁궐의 정문으로서 다른 궁궐들의 정문과는 달리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중층구조의 누각을 세워서 마치 성곽의 성문과 같은 격식으로 장대하게 지어졌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1968년에 경복궁 정문의 위치로 다시 옮겼으나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위치 또한 제자리를 찾지 못하였다. 현재의 광화문은 2010년에 원래의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아서 다시 복원한 것이다. 

     

    흥례문(興禮門)과 좌우행각(左右行閣)

    원래 이름은 홍례문(弘禮門 - 예(禮)를 널리 편다)으로 태조 4년(1395년) 창건되어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었다가 고종 4년(1867년)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이 중건하면서 청(淸) 건륭제(乾隆帝)의 이름인 홍력(弘歷)에서 홍(弘)자를 피하기 위해 흥례문으로 고쳤다고 한다. 

     

    1916년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흥례문을 비롯한 주변 행각이 모두 파괴되었다가 경복궁 복원사업으로 2001년 복원하였다. 

     

    유화문(維和門) - 신료들이 서쪽 궐내각사와 빈청을 드나들던 문이다.

    근정문(勤政門)

    근정문에서는 왕과 문무백관이 조참의식(소조회)를 행하였다. 

    또는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는데, 단종은 근정문에서 즉위를 한 첫 번째 왕이다.

     

     

     

    근정전(勤政殿) - 국보 제 223호    

    경복궁의 정전(正殿)으로 왕이 신하들의 조하(朝賀:조회의식)를 받거나 공식적인 대례(大禮) 또는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수정전(修政殿) - 보물 제1760호

    세종대(世宗代)에 집현전(集賢殿)이 위치한 궐내각사(闕內各司)지역에 고종대(高宗代)에 새로 지은 전각(殿閣) 이다. 고종대 초기에는 임시로 편전(便殿)의 역할도 하였으며, 1894년 갑오개혁 당시 내각 본부인 군국기무처로 사용되었다.

    편전 일곽의 서편전에 해당하는 천추전(千秋殿)

    사정전(思政殿) - 왕이 신하들과 일상으로 정사를 논의하던 편전(便殿)으로 보물 제1759호이다.

    앙부일구(仰釜日晷) - 세종 16년(1434년)에 처음 만들어진 천문의기로서 해시계의 일종이다.

    편전 일곽의 동편전에 해당하는 만춘전(萬春殿)

    강녕전(康寧殿) -  왕의 침전(寢殿)이며 월대(月臺)에서는 의례가 거행되기도 하였다. 

    지금의 강녕전은 경복궁 복원사업으로 1995년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교태전(交泰殿) - 왕비의 침전(寢殿)으로 중궁(中宮) 또는 중전(中殿)으로 불렀다. 

    지금의 교태전은 1990년에 다시 중건한 것이다. 

    교태전 후원(後苑) 아미산(峨嵋山)

    아미산에는 다양한 화초를 심어 화계를 꾸미고 교태전 온돌에서 나오는 연기가 빠져 나갈 수 있는 굴뚝을 세웠다. 또한 호수나 연못을 상징하는 모양의 석함(石函)을 두어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풍경을 조성하였다.

    흠경각(欽敬閣) - 세종 20년(1438) 장영실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흠경각에는 절기와 시간을 알리는 자동 천문 물시계로 알려진 옥루기륜(玉漏機輪)이 설치되었다.

    함원전(含元殿) - 불사(佛事)를 행하던 곳이다.

    자경전((慈慶殿) - 보물 제809호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고종의 양어머니가 되었던 조대비(신정왕후)를 위하여 지은 건물이다. 건물을 지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로 소실된 것을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자경전 십장생(十長生) 굴뚝 - 보물 제810호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십장생 무늬와 당초문, 그리고 박쥐문을 정교하게 새겨 넣어서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조형미를 보여주는 굴뚝, 기존의 담장에 기대어 쌓아 흡사 담장의 일부처럼 보이게 한 재치도 돋보인다.

    자선당(資善堂) - 세자(世子)와 세자빈(世子嬪)이 함께 거처하는 동궁(東宮)으로 세종 9년(1427년) 세자인 문종(文宗)의 거처로 건립되었다. 경복궁 복원사업으로 1999년에 복원되었다.

    비현각(丕顯閣) - 동궁(東宮)에 부속된 전각이며 세자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다. 경복궁 복원사업으로 1999년에 복원되었다.

    자선당 기단(基壇)과 주춧돌

    자선당(資善堂)은 왕세자 및 세자비의 거처로서, 자선(資善)은 '어진 성품을 기린다'는 뜻이다.

     

    자선당은 세종 9년(1427년) 근정전의 동쪽에 건립된 이후 여러차례의 화재로 소실과 중건을 거듭하다 고종 25년(1888년)에 중건되었다. 조선의 국권이 상실된 이후 1914년에 일본은 자선당을 철거하여 일본으로 옮겨갔다.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는 1916년에 자선당을 동경에 있는 자신의 자택으로 옮겨 '조선관(朝鮮館)'이라는 현판을 달고 사설미술관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건물은 모두 소실되고 기단과 주춧돌만 남게 되었다. 이것을 1993년 당시 문화재전문위원 김정동(金晶東) 목원대학교 건축학과 교수가 발견하여 1995년에 국내로 들여왔으나, 구조 안전상의 문제로 동궁 권역인 자선당 복원 건물의 기초를 세우는 데에 재사용되지 못하고 지금 이 자리에 남게 되었다.

    함화당(咸和堂), 집경당(緝敬堂) - 외국 사신을 접견한 기록이 간간이 등장할 뿐 건물의 용도가 명확지 않다. 

     

    향원정(香遠亭) - 보물 제1761호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연못 한가운데 인공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 정자를 지어서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향원정(香遠亭)이라 불렀다. 향원지를 건너는 다리는 “향기에 취한다”는 뜻의 취향교(醉香橋)이다.

     

    건청궁(乾淸宮) - 왕과 왕비가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면서 거처할 목적으로 지어졌다. 고종 10년(1873년)에 와서 지어진 건물이다. 궁 안에 최초로 전등이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장안당(長安堂) - 왕의 처소

     

    곤녕합(坤寧閤) - 왕비의 처소

    1895년 일본인들이 궁궐을 습격해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은 곤녕합의 누마루인 옥호루였다. 이 사건 이후 건물은 한 동안 방치되었다가 철거되고 말았으며, 2006년에 와서 다시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팔우정(八隅亭), 집옥재(集玉齋), 협길당(協吉堂) 

    이 3채의 건물은 당초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진 건물이었으나, 1888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이 전각들도 옮겨온 것이다. 고종은 이 건물들을 어진의 봉안 장소와 서재 겸 외국사신 접견장으로 사용(1893년 한 해에만 영국, 일본, 오스트리아 등 외국 공사들을 다섯 차례 접견)하였다. 

    이 3채의 건물은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중국식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신식이라고 생각되던 중국풍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집옥재의 현판을 송나라 명필인 미불(米連, 字 元章)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중국풍으로 만든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태원전(泰元殿) -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御眞)를 모시던 건물이다

    영사재(永思齋) - 국상(國喪)과 관련한 의례용 건물

    경회루(慶會樓) - 국보 제 224호    

    침전인 강녕전 서쪽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으로 외국사신 또는 군신간의 연회장소이며, 임금은 올바른 사람을 얻어야만 정사를 바로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경사스러운 모임이 있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경복궁 창건 당시는 작은 누각이었던 것을 태종 12년(1412년)에 크게 연못을 파고 지금과 같은 규모로 만들었다. 그 후 성종 때 건물이 기울어져 다시 고쳐 지었으며 현재의 경회루는 고종 4년(1867년)에 중건된 것이다.

     

     

    풍기대(風旗臺) - 대 위에 구멍을 뚫어 깃대를 꽂고 그 깃대에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가늠했던 기상 관축기구이다. 18세기 유물로 추정되며 보물 제 847호이다.

     

     

     

    (17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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