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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광조 묘 및 신도비
    여 행 2019. 2. 10. 08:30

    조광조 묘 및 신도비 (趙光祖 墓, 神道碑)

     

    주   소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산 55-1

     

    조선중기의 문신인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선생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소학동자(小學童子)’ 로 널리 알려진 김굉필(金宏弼)에게 학문을 배움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종장(우두머리)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정치가로서는 사림파(士林派)를 이끄는 지도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중종 5년(1515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면서 관직에 발을 들였습니다. 당시 사회분위기는 폭군 연산군에 의해 무너진 사회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 변화를 모색하고 있던 시기였는데, 선생은 사림파를 이끌며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유교를 정치의 근본으로 삼아야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와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리고 향촌을 유교이념으로 교화하기위해 '상호부조(相互扶助)'를 내세운 '여씨향약(呂氏鄕約)' (향약 : 향촌 공동체 규약)을 팔도에 실시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을 폄과 동시에 신진사류(사림파)를 이끌면서 훈구대신(勳舊大臣)의 부패를 질타하고, 잘못된 제도를 혁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자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특히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당시 기득권 세력이었던 훈구파(勳舊派)의 강한 반발과 노여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결국 훈구파에 의하여 전라도 능주로 유배된 후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훗날 선조 연간에 선생의 명예를 회복하여 주고 영의정에 추증(追贈)하였습니다. 시호는 '문정(文正) '이며, 문집으로 '정암집(靜庵集)'을 남겼습니다.

     

     

    시비(詩碑)

     

    신도비(神道碑)는 총높이 약 311㎝, 비신의 높이 244㎝, 폭 93㎝, 두께 34㎝로 선조 18년(1585년)에 건립되었으며 앞면에 “문정공정암조선생신도비명(文貞公靜庵趙先生神道碑銘)”이라는 구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노수신(盧守愼)이 짓고, 이산해(李山海)가 글씨를 썼으며, 김응남(金應南)이 전액(篆額, 전서체로 쓴 머리글자)을 썼다.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追贈)된 조광조의 부인 이씨(李氏)와의 합장묘(合葬墓)이다.

     

     

     

     

    (19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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