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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晉州城)
주 소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홈 피 : https://www.jinju.go.kr/02232/02818/02237.web
진주성은 외적을 막기 위하여 삼국 시대부터 조성한 성으로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유서 깊은 곳이다. 고려 말 우왕 5년(1379년)에 진주 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왜구의 잦은 침범에 대비하여 본래 토성이던 것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직후에는 성의 중앙에 남북으로 내성을 쌓았다.
선조 25년(1592년) 10월 왜군 2만여 명이 침략해 오자 김시민(金時敏)장군이 이끄는 3천 8백여 명의 군사와 성민이 힘을 합쳐 물리쳤으니 이것이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이듬해 6월에는 왜군 10만여 명이 다시 침략했고, 민간인과 관료, 군인 등 7만여 명이 이에 맞서 싸우다 모두 순절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성곽의 둘레는 1,760m이고 높이는 5 ~ 8m으로 사적 제 118호이다.공북문(拱北門) - 진주성의 실질적 정문이다.
촉석문(矗石門)
촉석루(矗石樓) - 진주성의 남장대(南將臺)로 장원루(壯元樓)라고도 부르며 6.25전쟁 전까지는 국보 276호였다. 전쟁 후 불탄 것을 1960년 복원하였으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666호이다.
의암(義巖) - 임진왜란 때 논개(論介)가 순국한 바위로 인조 7년(1629년) 진주의 선비 정대륭(鄭大隆)이 글자를 새겼다.
의기사(義妓祠) - 논개(論介)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7호이다.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 - 임진왜란 때 큰 전공을 세운 성주목사 제말(諸沫)장군과 그의 조카 제홍록(諸弘祿)장군의 충의를 기리고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3호이다.
* 김시민장군 전공비(金時敏將軍 戰功碑) -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장군의 전공비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1호이다.
*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檀碑) - 숙종 12년(1686년) 제 2차 진주성 싸움(1593년)에서의 충정과 전공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세워졌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2호이다.
임진대첩 계사순의단(壬辰大捷 癸巳殉義壇) - 임진년(1592년)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높이 받들고 계사년(1593년)에 순국한 7만 민군관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제단이다.
임진왜란 진주성 1차 전투(1592년 10월)에서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3,800여 명이 왜군 3만여 명에 맞서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물리친 임진년의 진주대첩을 기리고, 이듬해인 계사년(1593년) 6월 진주성 제2차 전투에서 성안의 민군관이 치열한 전투 끝에 모두 순절(殉節)한 의로은 넋을 기리는 장소로 1987년 세워졌다.호국종각(護國鐘閣)
진주성 우물
3.1독립운동 기념비, 진주지구 전승비
서장대(西將臺) - 진주성의 서쪽 지휘소로 회룡루(回龍樓)라고도 부른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6호이다.
호국사(護國寺) ☞
포루(砲樓)
국립 진주박물관 ☞
북장대(北將臺) - 진주성의 북쪽 지휘소로 진남루(鎭南樓)라고도 부른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4호이다.
용다리
비석군(碑石群)
경절사(擎節祠) - 고려 초 거란에 대항하다 순절한 하공진(河拱辰)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한 사당.
운주헌터(運籌軒址) - 조선시대 통제사와 병사의 집무실인 운주헌 터
청계서원(淸溪書院) -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정신열(鄭臣烈)과 고려 말 물레를 만든 정천익(鄭天益)의 위패를 모신 진주시 대평면 마동에 있던 서원으로 고종 5년(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것을 1961년 복원하면서 진주성(晉州城) 안으로 옮겼다.
창렬사(彰烈祠) -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한 분들의 신의를 모시기위해 선조 40년(1607년)에 건립된 사액(賜額)사당으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5호이다.
영남포정사 문루(嶺南布政司 門樓) - 진주성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조선시대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의 문루이며 망미루(望美樓)라고도 부른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667호이다.
김시민 장군(金時敏 將軍) -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勉吾),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무과에 급제, 훈련원 판관이었을 때 군사에 관한 일을 병조판서에 건의한 것이 채택되지 않아 관직을 버렸다가 선조24년(1591년) 진주판관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천, 고성, 진해등지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올라 금산(김천)에서 다시 적을 격파하였다. 왜적의 대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진주목사가 되어 불과 3,800명의 병력으로 6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격퇴하고 대첩을 이루었으나, 이마에 적탄을 맞고 순국하였다.
(21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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