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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고해
*고해소는 치유의 자리*
고해소는 다른 종교에는 없는 우리 교회만의 고유하고 특유한 자리다.
내 안의 불편한 것들, 차마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고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을 털고 토해내서 속을 비우는 자리가 고해소다. 정신의학적 관점에서도 고해소는 아주 의미 깊다.
문제는 고해소 운영자, 즉 고해신부들이 어떤 사람들인가에 따라서 상처 치유는커녕 악화되는 경우도 허다하다는 데 있다. 신자들이 고해소에 들어가기 힘들어하는 것은 고해소가 치유의 자리가 아니라 재판정 처럼 여겨져서이다. 고해소에서 상처 입고 냉담하는 신자들이 적지 않다. 이처럼 고해소가 본래 기능을 못하는 것은 고해신부들의 심리적 문제가 크거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제들은 죄를 판단하는 재판관들이 아니라 상처 입은 신자들을 치유하는 치유자들이다. 그렇게 하기 어려우면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신자나 교회를 위해 유익하다.
신자분들 상담 내용중 상당 부분이 죄에 대한 것이다. 문제는 죄가 아닌 걸 죄라고 인식하는 데 있다. 사소한 행동까지 다 죄라고 여기면 신경증적인 강박증, 심리적 결벽증이 생긴다. 이런 상태는 심리적 불편감을 동반하기에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내적 불편함이 최대 용량에 달하면 결국에는 정신적으로 무너지거나 아예 신앙에서 떨어져 나간다. 무지한 종교인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리거나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는지 모른다. 종교인들의 무지는 그냥 모르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원인이다.
*완전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사람다움*
"세상을 깊이 통찰한 이는 인간이 천박하다는 사실 속에 깊은 지혜가 숨어 있음을 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한 말이다.
인간의 죄성에 대하여 지나치게 민감한 사람들. 성과 속을 딱 잘라 구분하여 세속이란 이름으로 낙인을 새기고 그 근처도 가지 않으려고 할뿐만 아니라 부정 탔다고 여기는 사람들. 심지어 마귀의 유혹에 빠졌으니 구마해야 한다고 을러대는 사람들. 고해소에 어렵게 죄를 고백하러 온 신자에게 어떻게 그런 짓을 하느냐, 그러고도 신자냐고 정의의 사도인 양 고함치기도 하고 심지어 고해소 문을 열고 범죄자 대하듯 경멸의 눈으로 본다는 사람들.
불경한 자, 세속적인 자, 혐오감 주는 자라고 사람들을 내리깔고 보고, 자신은 깨끗한 영적 존재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자들, 그들의 유전자는 히틀러에게서 온 것이다. 히틀러는 당대 독일 여성들의 흠모 대상이었고, 깔끔하고 매너 있고, 지성적이고 예술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귀족적인 삶을 추구하는 그의 마음 안에는 혐오감이 있었다. 인간의 완벽함, 독일 국민의 완벽함을 꿈꾸던 그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독일인 장애인들마저 학살하였다. 폴란드 아우슈비츠에는 독일인 장애인들의 물품들로 가득한 방이 있다. 인간이 완벽함을 꿈꿀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곳이 증언한다 사람은 자신이 절대로 완전할 수 없음을, 자신의 마음이 맑은 샘이 아니라 시궁창임을 인정할 때 사람다워진다. 다른 사람들은 천박하다고 여기는 자신의 천박함을 알아야 사람다워진다.
*강점을 키우는 자기성찰*
욕구와 감정을 자각하는 것은 마음이 건강을 찾았다는 신호이다. 몸이 아플 때는 입맛이 없다. 그저 죽고 싶을 뿐... 회복되면서 입맛이 살아난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회복되면서 욕구와 감정이 느껴진다.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느낀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우리 교회에서는 욕구를 죄악시하고 감정을 믿음이 약한 자들의 것이라 여기는 종교적 편견이 강한 편이다. 오래전 읽은 이야기인데 식사 전 음식이 맛있어 보여서 기도를 깜빡 잊고 먹다가 죄책감에 재를 뿌리고 먹었다는 이야기가 기억난다. 유사한 이야기들이 열심인 신자들 사이에 전해 내려온다. 감각 박탈 현상이다. 장기간 감각을 격리시키면 심리적으로 정상이 되지 못한다. 세속이란 이름으로 감각을 박탈하고 자기를 격리시키면 조현병 환자들처럼 종교적 망상에 시달리게 된다.
"약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강점을 키워라." 피터 드러커의 말이다. 자기성찰의 시간이란 자신이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지 건강 검진하듯 살펴보는 시간이다. 어린 시절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이들 중 지나친 자기성찰로 신경증자가 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말도 안 되는 신앙 상식에 시달리며 사는 이들…. 이들은 자신을 죄의 덩어리로 인식한다.
가끔 자위하는 자신이 추한 욕망의 덩어리라고 자학하는 이들도 있다. 고해신부가 자위는 대죄라고 했다니 생리적 현상을 죄악시하는 무지에 놀랄 따름이다.
우리 교회는 오랫동안 인간의 약점에만 초점을 맞춰왔다. 침묵과 순종이란 명분 하에 사고방식의 획일화가 강하다. 서서히 가라앉는 배와도 같은 우리 교회가 다시 일어서려면 약점이 아닌 강점을 키워야 한다.
마음 치유하는 데 최상의 시스템을 갖춘 교회를 가라앉게 하는 건 배를 모르는 무지함이다.
*자신 안의 어두움을 직면하며 나아가야*
주님은 자신을 격리시키지 않은 분이시다. 세상에 당신을 드러내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신 분이시다.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지나치게 추구하느라 자신을 격리시키는 사람들은 자기를 과대평가하는 분열증자들이다. 자신 안의 어두움을 직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격리가 심하고, 마치 자신이 영적 존재인 양 도를 터득한 사람인 양한다. 사람은 사람일 뿐이다. 사람의 한평생은 욕구 충족의 연속이라고 한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우의 말을 유념해야 한다.
- 홍성남 마태오 신부 -
비타꼰 '22.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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