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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 335호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국 보 2024. 3. 16. 08:30
국보 제 335호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 (二十功臣會盟軸-保社功臣錄勳後)
소재지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490-8, 한국학중앙연구원
지정일 : 2021년 02월 17일
‘이십공신회맹축 –보사공신녹훈후’는 1680년(숙종 6) 8월 30일에 개국공신(開國功臣) 이래 보사공신(保社功臣) 까지의 공신과 그 자손들을 모아 회맹제(會盟祭)를 거행한 후 작성한 회맹축이다. 이 회맹축이 작성된 시기는 1694년이다. ‘보사공신’이란 1680년(숙종 6)년 4월에 서인이 다시 집권하게 된 ‘경신환국(庚申換局)’ 때에 공을 세운 이들에게 내린 훈호(勳號)였으나, 1689년에 삭훈되었고 이후 1694년(숙종 20)년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삭훈된 공신들을 복훈(復勳)한 공신들을 말한다. 국보 회맹축은 이러한 숙종 연간 보사공신의 녹훈-삭훈-복훈이라는 역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실물 자료로서 오래 전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공신과 공신의 적장자손(嫡長子孫)에게 반사하기 위해 활자로 간행한 ‘회맹록(會盟錄)’은 많은 복본(複本)을 제작한 결과 전래본이 다수이지만, 이 회맹축은 반사본(頒賜本)이 아닌 어람용이므로 유일본에 해당된다. 공신회맹이 있을 때마다 어람건 회맹축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1910년까지 전래가 확인된 회맹축은 3건에 불과하다. 1646년(인조 24)년과 1694년(숙종 20) 제작한 2건과 1728년(영조 4) 분무공신(奮武功臣) 녹훈 때의 이십공신회맹축이다. 이 중 영조 연간 분무공신 녹훈 때의 이십공신회맹축의 실물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는 정치적 안정을 기하기 위해 역대 공신과 후손을 모아 충성맹세를 받았던 회맹제를 거행했을 때의 회맹문과 보사공신을 비롯한 20종의 공신과 그의 적장자손 총489명의 명단을 기록한 회맹록 및 종묘축제문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제작연대, 제작사유가 명확히 적혀있고 그 위에 국새인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찍혀 있어 기록문화적 의미 역시 매우 크다. 숙종 대 녹훈도감(復勳都監)에서 제작한 이 회맹축은 1694년에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을 거치면서 서인과 남인의 정쟁으로 혼란하였던 정국을 수습하고 왕권을 강화하고 삭훈되었던 보사공신들을 복훈(復勳)하면서 서인과 남인의 정쟁으로 숙종의 정치적 의도를 엿볼 수 있어 역사적 사료로서 정치사적 가치가 높다. 아울러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호화롭고, 장대하게 제작되어 공예, 직물사적으로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세로 88.8cm, 가로 2,414cm의 긴 두루마리에 당시 글씨를 잘 썼다고 알려진 서사관 이익신(李翊臣)이 글씨를 쓰고, 국왕을 위해 옥이나 상아, 생초(生綃)나 비단과 같은 최고급 재료를 사용하고, 숙련된 기량을 지닌 관청 소속 경공장들이 솜씨를 발휘하여 형식적인 완성도가 높아 조형 예술적으로도 주목된다. 이 어람회맹축은 이것을 만드는 전말을 기록한 『녹훈도감의궤(錄勳都監儀軌)』를 통해 평남 성천에서 옥축(玉軸)을 진상하거나, 베틀로 생초(生綃)를 직조하고 다회틀로 다회(多繪)를 짜고 상아로 비녀(簪)를 만들었으며, 비단 위에 배접을 3번 바르고 매끈하게 광낸 후, 화원 한후방(韓後邦)이 인찰을 긋는 등 어람용을 제작하는데 필요한 고급 재료와 도구 및 장인의 기록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어 왕실공예품의 기술적 수준도 알 수 있게 한다. (출처 : 문화재청)'국 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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