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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정 삼의사비 (濟州大靜三義士碑)
주 소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728-9
1901년 5월 ‘이재수의 난'의 세 장두(狀頭)인 강우백·이재수·오대현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로 1961년 홍살문거리에 세웠으나 마모되고 초라해져 1997년 4월 20일 대정고을 연합청년회가 현재의 자리에 새로 세웠다.
** 비(碑)의 전문(全文)
여기 세우는 이 비는 종교가 무릇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식이 될 것이다. 1899년 제주에 포교를 시작한 천주교는 당시 국제적 세력이 우세했던 프랑스 신부들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그때까지 민간 신앙에 의지해 살아왔던 도민의 정서를 무시한데다 봉세관과 심지어 무뢰배들까지 합세하여 그 폐단이 심하였다. 신당의 신목을 베어내고 제사를 금했으며 심지어 사형(私刑)을 멋대로 하여 성소 경내에서 사람이 죽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이에 대정고을을 중심으로 일어난 도민 세력인 상무회(象武會)는 이 같은 상황을 진정하기 위하여 성내(城內)로 가던 중 지금의 한림읍(翰林邑)인 명월진(明月鎭)에서 주장인 오대현(吳大鉉)이 천주교 측에 체포됨으로써 그 뜻마저 좌절되고 만다. 이에 분기한 이재수(李在守)·강우백(姜遇伯) 등은 2진(二鎭)으로 나누어 성을 돌며 민병을 규합하고 교도들을 붙잡으니 민란으로 치닫게 된 경위가 이러했다. 규합한 민병 수천명이 제주시 외곽 황사평(黃蛇坪)에 집결하여 수차례 접전 끝에 제주성(濟州城)을 함락하니 1901년 5월 28일의 일이었다. 이미 입은 피해와 억울함으로 분노한 민병들은 관덕정(觀德亭) 마당에서 천주교도 수백 명을 살상하니 무리한 포교가 빚은 큰 비극이었다.
천주교측의 제보로 프랑스 함대가 출동하였으며 조선 조정에서도 찰리위사(察理衛使) 황노연(黃耆淵)이 이끄는 군대가 진입해와 난은 진압되고 세 장두는 붙잡혀 압송되어 재판과정을 거친 후에 처형되었다. 장두들은 끝까지 의연하게 제주 남아의 기개를 보였으며, 그들의 시신은 서울 청파동 만리재에 묻었다고 전해 오나 거두지 못하였다.
대정은 본시 의기 남아의 고장으로 조선 후기 이곳은 민중봉기의 진원지가 되어왔는데, 1801년 황사영(黃嗣永)의 백서사건으로 그의 아내 정난주(丁蘭珠)가 유배되어 온 후 딱 100년 만에 일어난 이재수 난은 후세에 암시하는 바가 자못 크다. 1961년 신축년에 향민들이 정성을 모아 제주 대정군 삼의사비(濟州大靜郡 三義士碑)를 대정고을 홍살문 거리에 세웠던 것이 도로 확장 등의 사정으로 옮겨 다니며 마모되고 초라하여 이제 여기 대정고을 청년들이 새 단장으로 비를 세워 후세에 기리고자 한다.
(160830)
** 제주 신축교안 미래 선언문 채택 의미 [평화신문 2003.11.16]
제주교구와 1901년제주항쟁기념사업회가 7일 화해 선언문을 채택함으로써 100년 동안 평행선을 달려왔던 양측이 과거사를 새롭게 정리하고 화해의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됐다.
이재수의 난 제주민중항쟁 으로 묘사되는 신축교안은 제주 민중들의 무장 봉기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희생된 사건. 그동안 천주교는 이 사건을 외세에 반감을 가진 민중들이 봉세관을 습격하면서 천주교인들을 탄압 박해한 사건으로 본 반면 제주도 민중들은 제국주의와 외세에 맞선 민중항쟁으로 평가해왔다.
하지만 제주교구는 제주선교 100주년(1999년)을 앞두고 1997년 10월 신축교안을 재조명하는 기념심포지엄을 99년에는 제주 MBC와 공동으로 좌담회를 여는 등 과거사 정리와 화해를 시도했다.그 결과 지난 2001년 1901년제주항쟁100주년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진실과 화해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한 데 이어 이번에 화해 선언문을 공동으로 채택하는 결실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번 화해 선언문 발표로 교회는 과거 전통사회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선교활동을 펼쳤던 점들을 인정하고 제주도 민중들도 봉기 과정에서 무고한 천주교인들이 희생됐다는 점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과거사에 대한 일방적 시각을 버리고 해묵은 갈등을 풀어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공동선언물 발표에 앞서 학술대회에서 박찬식 역사학자는 역사적 기억과 화해 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항쟁에 대한 과거 역사에 대한 기억은 의거와 교난 이라는 평행선을 달려왔다 며 최근 4·3사건이 대통령의 공식사과로 화해의 길로 들어선 것처럼 제주항쟁 에 대해서도 상호 화합의 방향을 공식적으로 선언할 때에 이르렀다 고 강조했다.
문창우(제주교구 교육구장) 신부는 한말 천주교와 제주전통사회의 만남 에 관한 주제 발표에서 1900년 김원영 신부가 쓴 "수신영약"에는 제주 전통사회에 대해 비극적 대립과 충돌에 머물렀던 천주교측의 인식이 담겨 있다 면서 하지만 천주교회와 전통사회의 대립 그 과정 속에서 벌어졌던 불행한 과거사는 종교문화간 만남의 과제로 화해의 의미를 다시 한번 부각시키고 있다 고 지적했다.
토론자로 나선 임문철(제주교구 중앙 주교좌본당 주임) 신부는 이 항쟁을 제주도 민중과 천주교신자간 항쟁이라고 보지만 천주교신자도 제주도 민중이라는 공동 의식이 전제된 상태에서 접근해야 한다 면서 이 항쟁을 미래 지향적으로 바라보며 진지한 반성과 진정한 화해가 이뤄져야 한다 고 말했다. - 김승호 명예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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