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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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례 성지 - 2믿 음/성지순례(167곳) 2020. 9. 17. 08:30
명례 성지 - 2 ➽ - 1 성모 승천 성당 순교자 탑 신석복 마르코 성당 - 2018년 5월 봉헌되었다. (200610) 낙동강 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는 명례 성지는 밀양과 김해를 잇는 나루가 있던 곳으로 일찍이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든 곳이다. 이곳은 네 가지 역사적, 문화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복자 신석복 마르코(1828-1866년)가 출생한곳이다. 둘째, 영남 지방의 네 번째 본당이자 마산교구에서는 첫 번째로 본당이 설립된 곳이다. 셋째, 명례 본당의 초대 본당 신부이자 세번째 방인 사제이며 한국에서 서품된(1896년) 첫 사제 인 강성삼 신부의 사목지이며 돌아가신 곳이다. 넷째, 2011년 경남도 문화재 자료 제526호로 지정된 성전 건물의 역사적 의미이다. 1938년 첫 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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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신석복 묘 - 2믿 음/그외 성지,성당 등 2020. 9. 16. 08:30
복자 신석복 묘(개정 증보판('19.6.30)에서 삭제) - 2 ➽ - 1 (200610) 복자 신석복 마르코는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에서 살았다. 명례 지방은 일찍이 피난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곳으로 신석복과 그의 가족들은 이들의 권면으로 신자가 된 듯하다. 그의 형제들은 신석복이 순교할 때는 신자가 아니었고 훗날 모두 입교하였다. 신석복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병인 치명 사적’ 에 따르면 포졸들은 신석복이 신자인 것을 알고 동네로 잡으러 왔었다. 그러나 그가 장사 나가고 없었기에 포졸들은 며칠을 기다린 뒤 돌아오는 신석복을 길에서 체포한 것이다. 신석복은 대구로 압송되었고 혹독한 심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했지안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신석복은 186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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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박대식 빅토리노 묘 - 2믿 음/성지순례(167곳) 2020. 9. 15. 08:30
복자 박대식 빅토리노 묘 - 2 ➽ - 1 (200610) 복자 박대식 빅토리노는 1811년 김해시 진례면 시예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부유했으며 언제부터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부친 박민혁과 형제들은(대붕, 대홍, 대식)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 병인박해를 만나게 된다. 병인박해 때는 가족 모두가 피신하여 잡히지 않았으나, 1868년 무진박해 때 박대식은 조카인 박수연과 함께 붙잡힌다. 박대식은 경상 감영에서 연일 배교를강요 당하며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1868년 8월 27일(음) 조카 박수연과 함께 참수 치명한다. 당시 박수연은 예비 신자 신분이었다. 박대식의 가족들은 순교자의 시신을 모셔 와 선산에 모시려 하였으나 마을 사람들과 집안의 외인들이 반대하자 하는 수 없이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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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 성당 - 2믿 음/성지순례(167곳) 2020. 9. 10. 08:30
대산 성당 (복자 구한선 타대오 성지) - 2 ➽ - 1 주 소 :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구혜리 246-3 주보성인 :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치명일기』에 따르면 구한선 타대오(1844-1866년)는 함안 미나리골(현재 함안군 대산면 평기 마을) 출신이다. 신심이 돈독하고 믿음에 충실해 병인박해(1866년) 직전 리델 신부의 복사로 거제도까지 가서 전교 활동을 하였다. 박해가 일어나자 리델신부는 충청도로 떠나고 구한선은 진주 인근에서 지내다 붙잡혔다. 그는 감옥에 갇혀 며칠 동안 혹독한 문초를 받았다. 심한 매질과 고문으로 성한 곳이 별로 없었다.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게 되자 관에서는 집으로 돌려보냈다. 본가로 돌아온 뒤 칠 일 만에 장독(杖毒)으로 죽었다. 나이 스물셋이었다. 구한선의 묘는 19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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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정찬문 안토니오 묘 - 2믿 음/성지순례(167곳) 2020. 9. 8. 08:30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 묘 - 2 ➽ - 1 (200609)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는 진주시 사봉면 출신으로 신자였던 아내의 권면으로 입교 영세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정찬문은 포졸에게 잡혀 진주 감옥에 갇힌다. 여러 번 심한 문초와 고문을 받았지만 배교하지 않았다. 특히 그가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아기를 등에 업고 주먹밥을 나르던 부인 윤 씨의 격려는 그가 굴하지 않고 순교의 월계관을 쓰기까지 커다란 공헌을했다. 결국 이듬해인 1867년 1월 25일(음력 1866년 12월 20일), 순교자는 매를 많이 맞은 끝에 진주옥에서 참수 치명한다. 그의 나이 45세 때였다. 죽은 뒤 그의 일가들이 순교자의 시신을 모셔 왔는데 머리를 가져오지 못한 채 하체(下體)만 장사 지냈다고 한다. 어찌하여 머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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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윤봉문 요셉 성지 - 2믿 음/성지순례(167곳) 2020. 9. 3. 08:30
복자 윤봉문 요셉 성지 - 2 ➽ - 1 (200609) 복자 윤봉문 요셉의 가족이 거제도에 정착한 것은 1868년경이다. 병인박해 중에 윤사우 스타니슬라오가 양산 '대처'를 거쳐 이곳 진목성에 와 전교 활동을 폄으로써 활발하게 포교 활동이 이루어진다. 윤봉문은 윤사우의 둘째 아들로 거제의 사도로서 형 경문과함께 교회 회장직을 맡아 신자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전교에 힘쓰는 한편 자신의 수계에도 열심이었다. 1888년 2월 7일(음) 옥포에서 체포된 윤봉문은 거제 부사 박병용의 호출을 받고 거제 관아로 끌려가 태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포졸들은 배교시키려고 심한 문초와 고문을 가했지만 순교자는 믿음으로 견디다 진주로 옮겨져 교살(絞殺)당해 순교하였다. 당시 나이 37세였다. 순교자의 가족으로는 부인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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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서원세계유산/한국의 서원 2020. 7. 15. 08:30
남계서원 (灆溪書院) 주 소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586-1홈 피 : http://namgye.co.kr/ 조선 명종7년(1552년) 개암 강익(介庵 姜翼)이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1450∼1504)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하고 명종 21년(1566년) 소수서원에 이어 전국에서 두번째로 사액서원이 되었다.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소실된 뒤 나촌(羅村)으로 터를 옮겼다가, 광해군 4년(1612년) 현재 위치에 다시 중건되었다. 사적 제 499호이다. 도동서원, 도산서원, 돈암서원, 무성서원, 병산서원, 소수서원, 옥산서원, 필암서원, 남계서원 9개 서원이 "한국의 서원(書院)"으로 2019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풍영루(風詠樓) 묘정비(廟庭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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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서원여 행 2020. 7. 12. 08:30
청계서원(靑溪書院) 주 소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669-1 조의제문(弔義帝文)사건에 연루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처형된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1464∼1498)을 기리기 위한 서원으로 연산군 1년(1495년) 청계정사(靑溪精舍)를 세워 유생을 가르쳤고, 광무 10년(1905년)에 유림들이 그 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1915년 청계정사를 복원하여 청계서원이라 부르고 김일손을 배향하였다.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 56호이다. 취도문(就道門) 구경재(久敬齋) 강당(講堂) 역가재(亦可齋) 내삼문(內三門) 청계사(靑溪祠) 탁영 김선생 유허비각(濯纓 金先生 遺墟碑閣) (200514)